글을 시작하기 전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여행할 때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려 간단한 입국심사를 받고 짐을 챙겨서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그때부터 시작되는 여행이라는 즐거움을 만끽할 기대에 부풀어 1분 1초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괜한 조바심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듯 평범하게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장 중요한 입국심사를 통과하고 공항을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도 자신이 입국심사에서 통과되지 못한 채 공항에 남거나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곤란한 상황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미국 방문객은 1번에서 15번 창구에 줄을 서시기 바랍니다."
입국신고서를 작성하고 입국심사를 받을 때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은 방문 목적을 묻는 말이다. 순조롭게 별일 없이 지나간다면 이후 공항을 나서 각자의 일정에 따라 행동에 나서는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공항에서는 별별 일들이 일어난다. 조작된 서류를 이용하여 불법으로 입국을 시도하는 무리나 잘못된 신념으로 주위에 피해를 주는 사람들, 자신도 모르게 규정을 어겨 억울한 처벌을 받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과 국가를 이어주는 공항이라는 공간이 갖는 특수성일 것이다.
주인공인 빅터 나보르스키는 입국심사과정에서 여권에 문제가 생겨 직원에 의해 2차 조사를 받게 된다. 하지만 영어를 못하는 그였기에 직원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고 잠시 후 책임자를 만나 입국심사를 다시 받게 된다. 문제가 되는 상황은 그가 출발한 크라코지아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모든 외교가 중단되었고 발행된 모든 여권의 여행 특혜가 중단되었으며 미국에서는 절차에 따라 그의 입국을 거절한 것이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는 도중에 조국인 크라코지아 공화국 내에서 발생한 쿠데타로 새 정부는 국경을 폐쇄하는 등 크라코지아에 돌아갈 모든 항공편이 중단되었으며 비자 역시 효력을 잃었고 크라코지아 공화국은 혼란스럽기 때문에 그는 무국적자로 판단되어 외교가 다시 회복되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도 미국에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이었다.
어떠한 보호나 망명, 난민 신청의 자격도 없으며 인도적 조치도 받을 수 없는 그저 ‘부적격자’라는 이 잔혹한 말이 앞으로 어떤 일을 초래할 것인지 당시의 그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국적자이자 부적격자의 신분으로 국제선 환승 라운지에 머무르게 된다. 내일까지는 정부에서 해결할 것이라는 말을 책임자가 남기는데 과연 그럴까? 라운지 내에서 방영되는 TV 화면을 보고 나보르스키는 그제야 자신에게 닥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고 그는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렇게 그는 수많은 군중 속에 갇혀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 이 고독함 속에서 마치 표류하는 배처럼 이리저리 휩쓸리게 된다. 그리고 리모델링을 앞둔 아무도 없는 낡은 터미널에서 크라코지아 출신의 남성이 보여주는 생존 아닌 생존, 환경에 적응하며 보여주는 인간미와 기다림을 담은 영화가 ‘터미널’이다.
기약 없는 기다림
이 순박하고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르는 남자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옳지 않은 일, 신념에 대해 다른 사람이라면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을 행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신분이 불분명해졌기 때문에 공항 보안의 책임자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를 바깥으로 나가도록 유혹하고 주변의 온갖 불합리함 속에서도 나보르스키는 자신이 믿고 있는 옳지 않은 일을 행동하지 않았으며 언제까지고 기약이 없는 기다림을 계속하는 장면은 CCTV로 그를 보는 공항의 직원뿐 아니라 화면으로 그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또 말이 통하지 않아 생기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국어로 설명된 관광 안내 책자와 공항에 비치된 영문 버전을 비교하며 영어를 공부해 말하는 장면에서는 사람이란 무섭게도 적응하는 생물이며 만약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그처럼 생활하고 도전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책임자가 그에게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망명 혹은 이민이라는 선택지를 주었을 때 그는 설령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조국은 전혀 두렵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의 국가가 공산 혹은 사회주의적 성향이 짙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고 작은 나라이지만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기에 이러한 반응을 보인 것이고 비록 전화에 휩싸였다고 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조국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마음 그 자체는 본받을만한 부분이라고 느껴졌다.
나보르스키가 마침내 공항을 빠져나왔을 때 느끼는 안도감과 자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원리원칙만을 따지며 길길이 날뛰던 책임자도 나보르스키가 공항을 빠져나와 목적지를 향하는 것을 보고는 언젠가 자신의 상급자가 말했던 원리원칙보다 인정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는 듯 그를 붙잡지 않고 업무에 돌아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나보르스키가 공항에 머무르는 동안 그를 계속 괴롭게 하고 그의 친구들이 가진 약점을 빌미로 크라코지아에 다시 돌아가게 하려는 책임자였으나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나보르스키의 모습을 보고 그의 마음이 바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보르스키의 모습에서 ‘끈기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든 목적을 이루는 순간이 온다.’라는 교훈을 생각하며 무려 9개월이나 계속된 이 황당한 생활이 마침표를 찍을 때 그를 본받아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한민국에 대한 감사
이 영화를 본 이후 내가 지금 해외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여행지에서 곤란한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의지할 수 있는 대사관이 있다는 사실이 외국에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위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외로 나가는 비행기에 탄 직후 국가가 붕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을까? 현재 대한민국의 위상이나 인지도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고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나라가 있으며 내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나를 도와줄 조국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느껴졌고 이러한 일상적인 자유가 계속될 수 있도록 여러 방면과 각지에서 노력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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