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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ㆍ애니 감상문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노인이 설 자리가 있을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감상문

by 망상바드 2023. 7. 9.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포스터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스물다섯에 보안관이 된 에드는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어왔고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범죄를 저지른 한 청년을 사형대로 몰았다는 사실을 나지막하게 말한다. 청년은 어린 소녀를 무참히 살해하였고 언론에서는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보도하였으나 청년은 언젠가 사람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하였고 자신이 출옥한다고 하더라도 또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말하였다며 에드는 할 말을 잃었다고 읊조린다. 그러면서 요즘 세상에 일어나는 범죄가 동기 없이 단순한 범인의 심리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에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과업을 뼈를 묻을 각오로 생을 마칠 때까지 이어가겠다는 각오를 다졌던 과거를 설명해 준다.

 

한편 어느 길가에서 또 다른 보안관에 의해 체포되는 남자 안톤이 있었다. 그는 보안관이 전화를 받는 틈을 타서 통화를 마치자마자 수갑을 이용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이후 아무렇지도 않게 경찰차를 타고 도로를 지나는 차를 정차시킨 후 탑승자를 살해하며 유유히 사라진다. 어째서 그가 보안관에게 잡혔는지 그리고 보안관을 살해할 이유는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이 그저 그가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가 보통의 범죄자와는 다른 유형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들판에서 저격총을 이용해 사냥하던 남자 르웰린이 있었다. 그는 사냥에서 허탕을 치고 돌아오며 우연히 총격전 끝에 사망한 범죄조직 구성원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험악한 현장의 주위에서 거액의 돈이 들어있는 가방을 발견하고 이를 입수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현장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돈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조직원들에 의해 쫓기며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다.

 

안톤은 계속 살인을 저지르며 유유히 사라졌고 이제 초반부에 내레이션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소개했던 늙어버린 보안관 에드가 그를 뒤쫓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안톤은 멕시코의 범죄조직에 고용된 듯 르웰린을 쫓지만 추적하는 과정에서 해당 조직의 간부를 스스럼없이 쏴 죽이는 모습이나 르웰린을 잡기 위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의 종잡을 수 없고 충동적이며 파괴적인 성격을 드러내었다. 이제 안톤도, 에드와 그의 젊은 동료 보안관도 돈과 함께 사라진 르웰린의 행적을 찾아 그를 뒤쫓고 르웰린도 자신을 쫓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며 죽음이라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미심쩍은 부분이 생긴 에드는 단서를 찾아 단독으로 안톤과 르웰린의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하며 사건에 얽혀있는 이들의 추격전이 계속된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감상문 썸네일

 

제목에서 노인의 의미

영화의 제목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노인은 에드를 의미할 것이다. 은퇴가 가까울 만큼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베테랑이자 오래 자신의 업무를 위해 싸워왔으며 초반에는 열정과 의욕으로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께서 자신에게 도움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두려움을 떨치고 범죄와 싸워왔으나 나이가 들고 여러 경험을 겪으며 더는 예전과 같지 않게 되어버린 노인 에드가 은퇴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빠르게 변화하는 현시대에 더는 그를 위한 공간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어 자신도 변화를 거듭하며 적응하였다면 무엇인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싶지만 이제는 힘도, 판단력도, 결심을 실행에 옮길 행동력도 부족해져 결국 모든 사건에서 늦게 도착해 뒷북만 치게 되는 그의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졌고 지금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과연 나는 이 속도와 변화에 적응하여 ‘노인’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다가오는 폭력

안톤의 모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마치 재앙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말투, 행동, 성격이 드러나는 태도의 모든 부분에서 그는 우연성을 강조하는 듯하였다. 당신이 나에게 죽게 되는 이유는 당신에게 있고 내가 필요한 것을 당신이 가지고 있어서 혹은 당신이 나의 말꼬리를 잡거나 나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침 당신 앞에 마주친 상대가 ‘나’라서 그 우연으로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의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에 공감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 내부적인 문제도 드러나지만 역시 그에게 가장 문제라고 느껴지는 것은 이 우연성이라는 자신의 결정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고 그 결정을 타인에게 강요한다는 것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르웰린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는 베트남 전쟁에 저격수로 참전하였고 은퇴 후 사냥이나 즐기며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남자이자 남편이었다. 어느 한순간 굴러들어 온 돈 가방에 이후 자신에게 닥칠 일을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이내 어떠한 적이 오더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끝까지 가겠다는 배짱으로 거액의 돈을 탐낸 그였지만 르웰린 역시 영화에서 묘사되는 ‘노인’일 뿐이었다. 안톤으로 묘사되는 현시대의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에 도망치며 나름대로 변화를 꾀하지만 ‘노인’이 되어버린 르웰린의 발버둥에도 점차 가까워지는 폭력의 모습을 추격전으로 연출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결정은 자신이 하는 것이다

르웰린의 아내가 우연성을 강요하는 안톤에게 “결정은 동전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정하는 거예요.”라고 말했을 때 안톤이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에도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묻지 마 범죄나 익명과 인터넷 속에 숨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사이버 범죄가 연일 뉴스에 보도되며 사람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범죄자들의 논리는 들어줄 가치조차 없지만 그들은 행동의 원인을 자신의 문제에서 찾지 않고 피해자들에게서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경향이 있는데 마치 안톤이 우연성을 근거로 드는 것처럼 피해자가 어떠한 행동을 하였다거나 어떠한 말을 하였다, 혹은 어떠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등이 바로 그러하다.

 

어떠한 강력범죄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에게는 티끌만큼의 잘못이나 실수가 있지 않으며 온전한 죄의 책임은 범죄자, 가해자에게 주어져야 함이 마땅하나 요즈음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쩌다가 그 길로 지나가게 되었다니.’, ‘운이 없었다.’ 등 안타까워하면서도 피해자에게 일부를 떠넘기는 듯한 말이 보이거나 그러한 일을 벌인 가해자는 오히려 큰 소리를 내며 피해자 혹은 유가족에게 2차 피해를 협박하는 모습에서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 그 끝에는 파멸만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고 영화에서도 복수에만 신경을 쓰다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파멸을 경고하였으나 이러한 복수를 접고 남은 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법과 제도가 온전하게 작용해야 한다. 인권이니 촉법소년이니 하면서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한 지능적인 범죄자들에게 과연 인권이라는 달콤한 사탕이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들은 인권이 없었기에 참사를 당한 것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며 존중해주지 않는 범죄자가 인권을 들먹이며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일이 옳은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생활 끝에 무언가 바뀌는 게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물론 대한민국이 현재 처벌보다는 교화에 무게를 두는 것처럼 보이며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가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저버릴 수 없는 현실이지만 스스로 인간이기를 저버린 그들에게 권리가 있을까? 르웰린의 아내가 말한 것처럼 결국 행동에 대한 결정은 그들이 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런 말을 하면 오해가 될 수도 있고 과장이나 비약이 심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아닌 ‘범죄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가 되어야 맞지 아니한가 이러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보면서도, 보고 나서도 복잡한 고민이 드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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