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가져오는 잔혹함
슈필만은 폴란드의 공영방송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폴란드계 유대인 피아니스트로 갑작스러운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집이 위치한 바르샤바에 고립된다.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할 것이라는 방송을 들어 피난에 떠나지 않고 회복될 것이라고 예상하며 머물지만 이후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의 상황은 악화된다. 처음에는 무력에 의한 개입이 없었지만 유대인을 구분하여 표식을 착용하도록 강제한 뒤 제한된 구역에 몰아넣어 활동을 억제하며 유대인에 대한 억압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고, 가족을 잃은 사람이 생겨도 이들이 갇혀있는 게토의 밖에서는 이전과 다름없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독일군은 자신들의 감정 해소를 위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급기야 일할 수 있는 청년과 약자를 나누어 청년들은 강제 노역소에 보내고 남은 사람들을 돌아올 수 없는 수용소에 보내버린다. 가족을 잃은 슈필만은 지인들에게 몸을 의탁하여 3년 동안 게토 인근과 바르샤바 중심가에서 지내지만 부족한 영양과 정체를 들켜 폐허가 된 게토 주변으로 도망쳐 돌아온다. 극심한 허기로 우연히 주운 피클 통조림을 따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한 독일군 장교를 만나게 된다.
독일군 장교는 자신의 이름을 호젠펠트라고 소개했고 슈필만이 지금까지 만났던 독일군과는 다르게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피아니스트였다고 소개하는 슈필만에게 피아노를 쳐볼 것을 호젠펠트가 말하고 긴장감 속에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연주를 시작한다. 슈필만의 연주를 들은 후 호감이 생긴 호젠펠트는 이후 슈필만에게 식량을 전해주는 등 러시아군에게 독일군이 패배하기 전까지 그에게 힘이 되어주었고 떠나기 전 이름을 물어보며 언젠가 연주회에서 다시 만날 것을 고대하며 헤어진다.
이후 입장이 뒤바뀌어 해방된 유대인과 간이 수용소에 갇힌 독일군이 만나는 장면에서 바이올린 연주자인 유대인에게 호젠펠트가 자신의 소식을 슈필만에게 전달해주라고 말하지만 그의 이름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떠나게 되고 이후 슈필만과 함께 해당 지역에 다시 도착하지만 이미 다른 수용소로 떠나게 되어 정리되어 있었다.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된 슈필만은 오케스트라와 합주한 뒤 많은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예술가로서의 고뇌
사유재산에도 제한이 생긴 뒤 집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할 만큼 부족함 없이 지내던 슈필만의 가족이 아끼던 피아노마저 제값을 받지 못하고 처분해야 할 만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과정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가족들이 수용소에 떠나기 전 남동생이 읽던 베니스의 상인은 우리 식의 표현으로 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오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끌려가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슈필만의 지인 중에는 나치의 편에 서서 같은 유대인을 억제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 조선이 고통받는 중에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웃과 친구를 공격하고 갈취했던 사람들이 겹쳐졌고 그런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 당시의 현실이 잘 드러난 것 같았다. 이후 그 친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는 아이러니와 함께 다른 지인들에게 숨어지내는 과정에서 집에 피아노가 있었지만 자신의 정체가 들킬까 두려워 연주하지 못하고 허공에 건반을 누르는 동작을 하며 상상으로만 자신의 음악을 즐기는 슈필만이 가여웠다.
처음 폴란드의 공영방송에서 피아노를 칠 때는 멀쑥한 옷차림과 외모로 고상한 예술가의 느낌을 보여주었다면 걸인과 다름없게 바뀌어 호젠펠트 앞에서 극심한 허기에도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에서는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마치 광기와 같은 예술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서 피아노를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음에도 상상하며 포기하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떨며 약하게 연주하지만 이내 허기와 비례하는 것처럼 음악적 욕구를 탐욕스럽게 표출할 때는 전율이 흘렀다. 음악적 소양이 깊지 않아서 음악이 주는 영감과 그 안에 담긴 해석은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연주하고 어느 부분은 부드럽게 다른 부분은 강하게 연주하는 슈필만의 곡에서 음악 자체가 생명을 가진 듯 생동감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다시 그를 보겠노라 약속한 장면은 이후 만나지 못할 것을 암시하며 마지막에 연주하는 곡이 마치 그에게 보내는 진혼곡 같았다. 영화를 다 본 후 호젠펠트에 대해 알게 된 몇 가지는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하여 평화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것과 나치의 사상과 정책에 회의감을 가져 많은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구해주었다는 것이었다. 주변에 있는 대부분이 잘못된 사상에 취해 죄를 범하고 있었으나 무엇이 옳은 일인가, 인간으로서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여 자신이 가진 힘을 선한 일에 사용한 호젠펠트와 같은 선인이 존경스러웠고 이와 대비되어 수용소에서 고문을 받아 사망한 그의 마지막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왔다. 영화를 통해 인종, 나이, 권력과 관계없이 음악이 주는 유대감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잘 드러나며 대조적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인간성마저 버려진 전쟁의 현실은 더욱 잘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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