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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ㆍ애니 감상문

영원한 금쪽이 제제의 이야기.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감상문

by 망상바드 2024. 6. 9.

감상문 한 줄 정리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상처받은 아이의 내면심리와 이를 보듬어주는 어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감상문.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영화 포스터

 

'나쁜 아이'의 현실도피와 교감의 시간

어른이 된 제제는 이제 자신의 상상력을 글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여 머릿속에서만 움직였던 환상의 나라를 이제 실물로 볼 수도 다른 사람에게 이를 전달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내 차를 타고 나간 그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랜 친구가 잠든 묘지로 향하여 그의 곁에 앉아 함께 나누었던 특별한 추억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6살의 어린 제제는 아버지의 실직으로 가난한 가정환경과 실직한 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먼 곳으로 일하러 다니는 어머니의 아래에서 형제들과 함께 자라는 소년이었다. 주변에서는 이 어린아이에게 악마가 있다며 진저리를 치는 장난꾸러기이지만 동생 루이스를 아끼고 챙기며 형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이 아이가 성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누구도 알지 못하게 말하는 고백은 자신의 삶이 정말 힘들어 도와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이러한 가난과 불우한 가정 형편에도 어린 제제가 마음의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따스한 친척 아저씨나 고도이아 누나 같은 주변 인물들에게 느껴지는 호의와 사랑 그리고 동생과 함께 상상의 놀이를 즐기는 소중한 시간 때문이었다. 점차 기울어가는 가세로 인해 제제의 가족은 이사를 결정하였고 새로운 집에서 제제는 작은 라임오렌지 나무를 상상의 친구 밍기뉴로 삼는다. 밍기뉴를 마치 말인 양 타고서 상상 속으로 빠져들 때면 제제는 거친 들판을 거침없이 달리는 자유를 느꼈으며 언젠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벗어나 수도로 떠날 것이라고 다짐한다.

 

밍기뉴와 나누는 교감의 시간 외에도 제제에게는 또 다른 모험의 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뽀르뚜가라고 불리는 남자의 차 뒤에 몰래 올라타 그가 운전을 시작할 때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재미를 느끼는 것이었다. 마을의 아이들이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이 위험천만한 놀이를 시도하며 제제는 친구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만 어린 제제를 기다리는 것은 뽀르뚜가의 험악한 인상과 위험한 놀이를 다시는 하지 못하게 만들 훈육이었고 그렇게 제제와 뽀르뚜가의 첫 만남은 약간 어그러진 채 시작되었다.

 

어린 제제가 심하게 장난을 치는 것은 그 나름대로 관심의 표현이었다. 가족들은 장난을 친 어린아이에게 제대로 된 훈육보다는 폭력을 앞세워 이 아이가 의지할 곳 없이 스스로 나쁜 아이라고 여기도록 고립시켰고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할 아이에게 가혹한 가정환경과 폭력은 이렇듯 잘못된 관심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유리병을 밟아 절뚝이는 제제를 본 뽀르뚜가는 가족도 물어보지 않았던 상처의 이유를 물어본 뒤 다친 아이를 자상하게 돌봐주었는데 어째서 친절을 베풀어 주었는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아닌지 몇 마디 말을 나누며 위험한 장난을 쳤던 아이와 아이의 장난에 야단을 친 어른일 뿐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가 특별한 유대감으로 바뀌었다.

 

둘 사이의 유대감이 생기며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제는 그저 험악한 아저씨로 보였던 뽀르뚜가의 모습에서 점차 다정한 마을 아저씨나 심지어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가족과 집에서 배우고 느낄 수 없었던 지식이나 예절, 사랑 등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뽀르뚜가의 집에 놀러 다니며 항상 사고뭉치, 장난꾸러기, 악마를 품은 나쁜 아이였던 제제는 이곳에서 그저 평범하게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였으며 그렇게 가까워진 두 사람은 나이를 넘어선 친구가 된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감상문 썸네일

 

다시 보았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과 바뀌지 않는 것

어떠한 매체라도 한 번, 두 번 보면서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다. 줄거리 등의 배경지식이 있거나 같은 장면을 보았더라도 이를 경험할 당시의 심리나 감정의 변화 등으로 이전에 느꼈던 감동이나 깨달음이 새로운 시각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마치 부드럽고 포근한 이불에 누웠을 때 점차 의식 속에서 이불이 사라지고 편안하다는 감각만 남는 것처럼 작가나 감독이 섬세하고 은은하게 깔아놓은 여러 장치 가운데 하나를 발견하였을 때 그리고 이를 자신이 살아온 환경이나 가치관과 연결 지을 때 우리는 작품을 한 차원 높게 감상하는 방법을 경험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본인에게 오래전 소설로 감상하였던 어린 제제의 주변 환경에 대해 그리고 그를 이해해 주었던 뽀르뚜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작품을 글로 접하였을 당시에는 그저 베스트셀러 작품, 필독서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의미나 깊은 고민 없이 작품을 읽었고 그때 들었던 생각은 상상력이 풍부한 장난꾸러기 제제가 뽀르뚜가라는 남자를 만나 인격적인 성장을 겪는 감동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였다. 어째서 제제가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는지 그의 심리는 관심 밖이었고 이 아이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상이나 뽀르뚜가라는 이해자의 자상함을 통해 아이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는 참 어른의 모습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았다.

 

비록 다른 매체를 통해 재해석된 작품이었으나 이번 기회로 이 아이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았을 때는 상상력이나 감정의 표출인 라임오렌지나무 밍기뉴보다 제제를 둘러싼 환경과 그의 심리에 집중하며 더욱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제대로 된 훈육보다는 폭력을 앞세워 어린아이를 고립시키는 가정환경과 그러한 환경에 스스로 나쁜 아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잘못된 행동을 시작하는 제제의 모습은 그의 불우한 유년기를 설명하는 장치였으며 실제로 주변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양육하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육아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듣게 된 결과 이 아이가 얼마나 사랑에 고팠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는 변화를 겪었다.

 

제제가 자신이 좋아하는 존재를 글자로 적는 습관이나 자신의 상상 속에서 그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비추는 모습, 상상 속 동물원의 무시무시한 동물들을 뽀르뚜가에게 설명하는 장면 등은 밖으로 표현할 길이 없는 내면의 외로움이 표출된 장치로 느껴진다. 그리고 제제가 상상의 동물원을 표현할 때 곁에서 뽀르뚜가가 이 아이를 바라보는 표정은 그가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나 이 아이의 풍부한 상상력에 놀라는 것보다도 천진난만한 제제가 또래의 아이들처럼 마치 자신의 미래와 같은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며 이 작품을 보는 우리 역시도 그의 표정처럼 상처받은 아이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뽀르뚜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만들던 연은 제제 본인을 투영하는 매개체였다. 하늘 높아 날아올라 그 역할을 다하는 연처럼 제제 역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열심히 만들고 있었으나 그에게 닥친 현실은 바닥에 고꾸라지고 갈가리 찢겨 쓰레기가 되어버린 비참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비참함은 어린 제제가 생각하기에도 가혹한 죽음이라는 상징성으로 이어지는데 언젠가 뽀르뚜가에게 말했던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말뿐인 위협의 의미가 실제로 살의를 보이는 것이 아닌 마음속에서 미워하는 그 사람의 존재, 의미 등을 지워버린다는 죽음의 이미지가 물로 투영되어 물에 고개를 처박은 자신의 모습이나 아버지의 모습, 물에 둥둥 떠다니는 장면 등이 바로 그러하였다.

 

그렇게 제제의 내면에서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하였고 다시 일하게 된 아버지가 온화하며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이전보다 조심스럽게 제제에게 말을 꺼내지만 이미 제제의 마음속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뽀르뚜가의 다정함으로 대체되었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되었다. 이처럼 작품을 감상하고 그 내용을 음미하면서 이전과 다르게 느껴진 부분들이 있었다면 바뀌지 않고 동일한 감동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던 울림은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걱정하며 이를 보듬어주었던 뽀르뚜가의 사랑이었으며 만약 언젠가 다시 이 작품을 보게 된다면 혹은 본인이 어린 제제를 돌봐주었던 뽀르뚜가 즈음의 나이가 되어 또 다른 감정이나 인식의 변화를 겪는다고 하더라도 이 사랑에 대한 감동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금쪽같은 내 새끼

육아 관련 예능 가운데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자신의 가정과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긴 출연자 가족의 일상을 본인들과 함께 보면서 아이가 어째서 그러한 행동을 하였는지 정신의학 전문의이자 육아 전문가인 오은영 박사로 대표되는 패널들과 함께 아이의 심리를 대변하여 대화하고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해결책에 따라 그들의 가정환경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는 예능이었다.

 

이를 본 많은 가정에서 단순히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였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아이와 대화하는 건강한 가정 내의 소통과 아동의 인권 향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단편적으로 영상을 함께 보는 출연자 대부분 처음에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태도를 보이며 어째서 아이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지 이해를 받으려는 언행을 보인다. 하지만 함께 영상을 보고 전문가의 분석을 통해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는 문제 상황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가 받았을 내면의 상처에 공감하며 이를 표현할 수단이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났음을 이해하고 반성할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시작됨을 보여주었다. 또 영상을 함께 보는 사람들에게도 물질적인 풍요 같은 경제적 지원이나 과도한 보호, 간섭 등보다 오히려 아이와 대화하며 진심 어린 교감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시간이 되었으며 시대의 변화와 부모가 되었어도 여전히 성장하지 못했던 우리 어른들도 금쪽이었음을 반성하는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하였다.

 

흔히들 자녀나 가까운 친척 아이 등을 아끼지만 그 아이에게 왠지 모르게 미안함이나 풍족하게 지원해주지 못한 아쉬움, 안타까운 감정이 들 때 그 아이를 ‘아픈 손가락’이라고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많은 형제를 포함한 가족과 어려운 가정 형편,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어머니도 이 아이를 사랑하고 싶었고 관심을 주고 싶었으나 녹록지 않은 현실은 제제를 아픈 손가락으로 만들었고 아픈 손가락은 자신의 상처를 알아채 달라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은 많은 행동과 말을 부모에 대한 모방으로부터 배운다. 제제가 성장하여 마치 자신이 되고 싶었던 뽀르뚜가와 같은 모습으로 수염을 기르고 애용하는 차를 타며 노래를 듣거나 그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도 아픈 손가락이었던 그의 상처를 자상하게 어루만져주고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뽀르뚜가를 닮기를 바라는 무의식을 표현한 연출일 것이라고 작품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상처받은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어주는 어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고 아이들이 경험하는 가장 첫 사회의 모습인 가정환경이 그들의 정서나 심리적 발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또 아이들의 행동과 감정을 이해하기 위한 소통과 교감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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