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한 줄 정리
현재의 삶에 불만이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주는 특별한 보드게임의 이야기인 쥬만지 감상문.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리지 않아?
1869년 깊은 숲 속에서 수상한 상자를 묻어버리는 두 소년은 어딘가 겁에 질린 듯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고 시간은 100년이 지나 어느 한 소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앨런은 신발공장을 운영하시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과 같은 두려움에도 언젠가는 맞서야만 한다는 말을 듣고 여럿이서 덤벼드는 그들에게 맞서려고 하였으나 결국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자신의 자전거마저 빼앗긴다.
자전거를 빼앗아 도망친 동네 아이들을 뒤로한 채 아버지의 공장 주변 공사현장에서 무엇인가에 홀린 듯 우연히 수상한 상자를 발견한 앨런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상자를 열어 그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상자 속에는 쥬만지라고 쓰인 보드게임이 들어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이 오래되어 보이는 보드게임을 열어보려던 앨런은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부름에 급하게 보드게임을 숨긴다.
항상 바쁜 아버지가 그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불만과 가문의 이름이 삶을 괴롭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한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가 자신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기숙학교에 보낼 것이라고 말하니 이는 어린 앨런의 반항심에 불을 피워 가출을 결심하는데 막 집을 나서려는 그와 친하게 지내던 여자아이 새라가 찾아오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상한 북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다가 함께 보드게임 쥬만지를 다시 열어 자세히 살펴보던 두 사람은 엉겁결에 주사위를 굴리며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새라는 자신이 굴린 주사위에 해당하는 이벤트를 경험하다가 겁에 질려 달아나버렸으며 앨런은 자신이 굴린 이벤트에 의하여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간 채 아무도 찾지 않는 게임 속에 갇혀 방치되어 그렇게 2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며 비어버린 앨런의 집에 새로운 가족이 들어오게 되는데 주디와 피터 남매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돌보는 고모와 함께 지내는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다락방에서 들리는 수상한 소리에 이끌려 마침내 쥬만지라는 보드게임을 발견한 뒤 앞선 이들처럼 주사위를 굴려 게임을 시작하는데 남매에게도 당황할만한 이벤트가 벌어졌으나 그 순간 괴상한 복장의 아저씨가 나타나 곤경에 처한 그들을 도와준다.
당연히 아저씨의 정체는 26년 전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간 앨런이었고 우연히 피터가 주사위를 굴려 밖으로 해방될 수 있는 경우의 주사위 눈이 나왔기 때문에 게임의 규칙에 의하여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으나 집으로 돌아온 앨런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26년이나 지나버린 세월과 사라진 가족을 비롯한 과거의 흔적을 되찾기 위해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신발공장으로 향하였고 폐허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앨런은 비로소 현실을 받아들인다.
쥬만지에 의하여 자신들이 소환한 게임 속 생물들로 마을에는 계속된 문제가 생기고 있었으며 이를 두 눈을 직접 확인하자 이들은 모든 것을 되돌리고 자신들의 삶을 되찾기 위해 게임을 속행해야만 했다. 피터가 앨런을 꾀어 게임을 다시 시작하려 하였으나 1969년 시작된 이 게임이 계속 진행되기 위해서는 앨런 이전에 주사위를 굴렸던 새라의 참가도 필수적이었기에 이들은 새라를 찾아가 그녀를 설득하고 함께 게임을 재개한다.
보드게임을 통한 유대감
최근 몇 년 동안 카페에서 고객들이 즐길 수 있도록 보드게임을 비치하는 매장이나 보드게임을 위한 전문적인 카페가 늘어가는 등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이 여러 취미를 갖게 되면서 이러한 게임들도 조명을 받아왔다. 특히나 보드게임은 오프라인에서 함께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대면을 통해 벌어지는 특별한 상황마저도 즐거움으로 남기 때문에 함께 해당 순간을 즐긴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유대감 또한 이러한 놀이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요소로 다가왔다.
설과 같은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함께 즐기던 윷놀이와 같은 우리의 전통 놀이도 보드게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윷놀이가 고대 부족사회에서 도, 개, 걸, 윷, 모의 동물들을 상징하는 부족의 화합을 위한 용도에 기원하였다는 가설이나 단순한 놀이를 넘어 점을 치는 등의 주술적인 범위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쥬만지라는 보드게임 역시 단순한 놀이의 범주를 넘어선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쥬만지가 새로운 세계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를 경험하도록 한다는 식의 해석을 통해 그들이 바라던 불만족스러운 삶의 무엇인가를 해소하려 하였다. 누군가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누군가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가족에 대한 불만을 누군가는 원치 않는 무엇인가에 대한 불편함 등 각자의 삶에서 그 형태는 다를 수 있으나 이들이 바란 것은 결국 불만을 해소하면서 이상적인 새로운 삶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었다.
보통의 보드게임이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계산적이며 타산적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상대방과 각축을 벌이지만 특별히 이 쥬만지라는 게임에서는 경쟁의 의미가 사라지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 인상적이라고 느꼈다. 비록 지금 다시 보기에는 약간은 조잡하게 보일 수도 있는 특수한 연출이나 장치들이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이 작품을 몰입하며 보게 된 요소는 앞서 말했던 유대관계에 있다.
쥬만지에서 각각의 등장인물은 자신이 앞서나가기 위해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지 않고 이벤트가 벌어졌을 때도 결승선 도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합심하여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의견 차이 혹은 사소한 실랑이가 생길 수 있으나 서로를 위한 배려의 행동을 통해 각자가 가진 불만이라는 갈등을 해소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이러한 경험이 진실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모습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한 말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쥬만지는 새로운 세계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를 이루어주는 것을 넘어 새로운 삶을 바라는 이들에게 그들의 삶을 되돌아볼 계기를 마련해 주어 스스로 삶의 변화를 다짐하고 이를 쟁취하는 교훈적인 요소를 담아낸 것이다. 타인을 이기기 위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닌 함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이 경쟁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오히려 신선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영화 '픽셀'을 보고 감상문을 적었을 때나 앨런이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 뒤에 한 행동을 통해 느꼈던 것은 삶의 변화가 게임이라는 작은 계기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변화는 이를 함께 경험한 동료가 있을 때 더욱 효과적일 것이기에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가족 혹은 가까운 지인들과 보드게임을 통해 자신이 가졌던 어떠한 불만을 해소하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쥬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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